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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도 유학 준비에 막막함을 느끼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 뉴요커 님 인터뷰
    유학 2020. 5. 7. 23:14

    Nak Nak 네 번째 인터뷰, 미국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계신 회원 뉴요커 님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뉴요커 님은 현재 다양한 소통 창구를 직접 운영하며 다사다난했던 미국 생활담과 미국 직장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신데요. 미국 유학과 이민을 준비 중이신 분들, 혹은 현지에서 취업을 고민하는 분들께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오늘도 짬을 내 책상 앞에 앉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뉴요커 님에게 유학 준비부터 정착까지, 미국 사는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아래 인터뷰는 2019년 8월 작성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현재(2020년 5월) 뉴요커 님은 글로벌 호텔 브랜드로 이직하여 식음료 사업부장으로 근무하고 계십니다. 더욱 다양한 뉴요커 님의 미국 직장 생활, 일상 이야기는 브런치유튜브 채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뉴요커 님 인터뷰는 2부로 나뉘어 게시됩니다.

     

    2부 “제 경험이 필요한 분들께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현재 뉴욕에서 직장 생활 중인 뉴요커입니다. 이렇게 구독자분들께 인사드릴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현재 글로벌 기업인 Compass Group 소속으로 프리미어 고객사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매니저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뉴요커  

    현재 살고 계신 지역에 사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살고 계신 지역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뉴욕과 뉴저지 지역에서 6년을 거주하였습니다. 부유한 가정 출신이거나 모아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던지라 뉴욕 시내에서는 살지 않았고 시 외곽 지역에서 주로 거주 하였습니다. 뉴욕에 오기 전, 로드아일랜드주의 주도인 프로비던스라는 조그마한 도시에서 살았던 저에게 뉴욕, 뉴저지는 깜짝 놀랄 정도로 한국 타운 및 문화가 크게 형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살았던 그 주에는 마트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조그마한 한인마트가 2~3개 남짓이었고, 한국 음식점 또한 5개 미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지금 생각해도 뉴욕, 뉴저지의 한인 문화는 매우 발달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놀라웠던 점은 흔히 생각하던 매우 부유하고 여유로우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뉴요커보다 우리나라의 서울처럼 바쁘고 열심히 살아가는 직장인들이 진정한 뉴요커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한적한 시골이나 자연환경을 좋아하는 성향인지라 처음에는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무척 싫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랜 고풍스러운 멋과 현대적 트렌드가 공존하며 자연스레 뉴욕의 문화로 녹여내는 뉴욕만의 매력이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멋진 매력이 있다는 것을 체험하며 점차 이곳의 매력에 빠져들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출퇴근하며 매일 지나는 센트럴파크와 시티뷰의 조화는 지친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숨 고르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멋진 매력인 것 같습니다. 

     

     

    미국 일상과 직장 생활에 관해 글을 쓰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글을 쓰신 이후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또 보람을 느끼신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정환경이 매우 부유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부모님께서 빚을 낼 수 있는 정도의 신용은 가지고 계셨고 조금씩 제 결혼 자금과 당신들의 노후 자금을 모아둔 것이 있으셔서 그러한 돈을 모두 털어서 유학을 왔었습니다. 주변 친척 중에 미국에서 유학하거나 직장을 구하는 데에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경험을 가지고 계신 분도 없었고, 강남이 아닌 지역 도시 출신이다 보니 주변 친구 중에 유학을 경험한 친구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정보를 얻게 되는 것에 매우 큰 한계가 있었습니다. 

     

    제가 유학을 준비하던 2010년 당시에는 카카오톡, 스마트폰, 블로그 등 지금 시대에 쉽게 정보를 구할 수 있는 매체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 수집이 어려웠습니다. 미국에서 졸업하면서 직장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비자나 체류신분 등에 대한 부분도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 공부하고 저 자신에게 맞는 최선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늘 스스로 조사해서 준비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보니 어느 순간에는 그 모든 것들이 서러움으로 몰려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무난한 대인관계를 만들며 살아왔고, 어디 가서 특별히 미움받을 예의 없는 짓을 하면서 살아온 것도 아닌데, 도움받을 곳이 많지 않다 보니 혼자 이겨내고 극복해온 지난 8년 정도의 시간이 서러움으로 밀려왔습니다. 어쩌면 제 성격이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존경할만한 어르신들도 알게 되고 좋았던 부분도 많았지만, 그와는 별도로 혼자 이겨내야 했던 부분들에 대한 회고에 너무 외롭기도 하고 타지에서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고민도 수도 없이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도 누군가는 제가 겪었던 상황과 비슷하게 답답하고 막막한 준비 과정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부족한 글솜씨지만 제가 가진 경험을 글로나마 적어서 그 글을 보고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드린다면 저에게는 매우 큰 영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브런치에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글을 쓰면서 보람을 느끼게 된 순간은 Nak Nak에서 제게 이메일로 제의를 보내주신 순간이었습니다. 대표님과 편집인님 두 분이 Nak Nak을 설립하게 된 계기와 목적도 저와 부합하는 부분이 많았고,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퍼뜨려지는 글의 파급력을 통해 조금 더 많은 분이 도움을 받으실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큰 보람을 느끼고 마음이 벅차올라서 적극적으로 ‘아울러’(Owler) 활동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학을 결심하게 된 순간부터 출국까지의 과정을 지난 글에서 소개해주셨는데요. 당시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사진 출처=뉴요커

    지금은 너무 감사하게도 제가 꿈에도 그리던 회사에서 매니지먼트 직급으로 회사 생활을 하며 행복한 삶을 준비하고 있지만, 유학을 준비할 때에만 해도 심적으로 많이 힘이 들었습니다. 특히 성격상 스스로 준비해서 빠르게 일을 추진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유학이라는 것을 너무 갑작스럽게 결심을 하기도 했고, 1년 남짓한 시간 내에 어학부터 생활까지 준비하는 것에 있어서 모르는 것이 산더미라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러지 말걸 싶었던 것은 유학원을 통한 유학 준비였습니다. 그 당시에야 유학이나 준비사항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고 쉽지 않았으므로 유학원을 통한 유학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이러지 말걸 싶었던 이유는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돌아봤을 때 스스로 유학을 준비해서 오는 학생들도 많은데, 당시 제 노력이 조금 부족했던 건 아닌가 싶은 마음에서 그러한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가장 후회되는 것은 유학을 준비하면서 부모님께 너무 큰, 마음의 상처들을 드린 점입니다. 유학이라는 장밋빛 환상에 취해서 반드시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나서부터는 집안 환경도 제대로 고려치 않고 고집을 과하게 부리면서 상처가 될 말들을 많이 했고, 그런 부분들이 평생 후회로 남을 정도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미국 대학원 생활은 어떠셨나요?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져 있던 저에게 토론 및 토의 형식의 수업은 매우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때 조별과제나 발표 등은 매우 익숙하고 자신이 있었지만, 교수님께서 수업하는 매 순간마다 학생들이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하는 방식은 지금 생각해도 어렵지만 매우 흥미롭고 재밌었습니다. 

     

    다만, 어학 능력은 부족한데 미국 학우들에게 지기 싫어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 A4 용지 10여 장에 달하는 원고를 혼자 작성하고 될 때까지 외우고 연습하기를 반복했습니다. 발음도 성에 차지 않아서 외운 내용을 녹음기를 사용하여 녹음하고. 준비가 되면 집에서 정장을 입고 제 모습을 비디오로 녹화하여 완벽한 발표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발표 당일이면 해당 강의실에 다른 학생들보다 1시간 정도 먼저 찾아가서 그 날의 동선이나 시선 처리 포인트 등 사전 답사 형식으로 발표가 완벽히 자신의 것이 되도록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사진 출처=뉴요커

    정말 특별했던 것은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 관련 수업 중 한국인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정말 카리스마 있으시면서도 특별히 잘 신경 써주시고 챙겨주셔서 매우 감사하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그 교수님 덕분에 미국의 고객서비스에 대해서 더욱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고 지금의 회사에서 그러한 부분으로 많이 인정받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자라서 유학을 떠나는 경우, 언어가 큰 장벽이 되기도 하는데요. 뉴요커 님은 어떠셨나요? 언어 때문에 경험한 아찔했던 순간 또는 불편함,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공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에게도 언어는 큰 장벽이었습니다. 특히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인데 뜻대로 나오지 않아서 답답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열정과 마음이 영어를 조금 더 빨리 숙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눈 폭풍이 크게 와서 전기가 3일 동안 들어오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미리 장을 봐둔 식재료값이 아까워서 쌓인 눈 속에 음식을 묻어두고 매우 불편하게 살았던 적이 있어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전기회사에 전화해서 따지려는데, 마침 한국어 서비스가 있더라고요. 근데 그 상담원분이 이민 2세대분이셨는지, 한국어로 통화하는 게 답답하게 느껴질 만큼 의사전달이 잘 안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어나 영어나 답답한 것이 마찬가지라면 영어로 그냥 부딪혀보자는 심정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 영어 상담원과 통화를 하였고, 메모해둔 내용을 기반으로 또박또박 천천히 상황을 설명하고 불편했던 사항들을 조목조목 따졌습니다. 상담원은 크게 공감을 해주며 최근 2개월 치의 전기세를 환불해줬습니다. 그때의 성공이 저에게 아주 큰 언어적 자신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듣고 검색을 해보니 미국은 공식적인 언어가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지배층이던 백인들이 주로 사용하고 그들의 편의로 보편화된 언어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여유롭게 배우고 익히고자 노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늘 제게 영어에 대해서 지인들이 물어보면 항상 설명해 드리는 것이 있는데, '입장을 바꿔서 한국 어느 도시에 외국인이 와서 한국어를 너무 과하게 유창하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엄청 대단한 것이지 못한다고 해서 손가락질받을 일은 아니지 않은가' 라는 점입니다. 물론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영어가 워낙 보편화 되어 있고 공용으로 사용하는 언어이니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그러한 점도 생각해가면서 너무 자신의 영어 실력에 기죽거나 절망하지 마시라는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구독자분들 중에서도 영어에 대해서 그러한 고충이 있으시다면 이 부분을 마음속에 심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자신감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단순 단어만으로도 명확히 표현하는 사람과, 자신감 없이 우물쭈물하는 사람을 비교해보면 전자가 훨씬 더 좋은 선택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꼭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써주신 글들을 읽다 보면 20대 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치열하다’라는 단어를 유난히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독하다" 싶었던 때가 있다면 언제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합니다.

     

    20대 시절, 군대를 전역한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력서 한 장을 들고 전주에 있는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를 찾아갔어요. 무작정 찾아가 일자리를 구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부모님께 학비를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구인 공고도 없었지만, 식음료나 고객서비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어 당시 전주에서 가장 큰 식음료 대기업이었던 아웃백을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파트타임일을 구해 2년 정도 일을 했습니다. 마감일을 주로 했는데, 보통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갈 수 있었어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학교에 가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왜 그랬냐면 군대에서 강력하게 다짐했었어요. 고등학교 때 부모님을 속상하게 해드린 일이 많으니, 대학교 때는 정신 차리고 공부하자고. 그렇게 파트타임일을 하면서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일은 또 소홀히 하기 싫어서 2년 동안 구두 4개의 밑창이 떨어지거나 구멍이 날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그 시절이 제가 가장 독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와서 가장 독했던 것이라면 당연히 6년 동안 한국에 못 가도 그 그리움을 독기로 버텼던 제 모습 같습니다. 학생 때는 신분적으로 출입국이 자유로웠지만, 월세를 내면서 집을 비우고 비행기 값을 내야 하는 것이 넉넉지 않아서 가지 못하였고, 졸업하고 취업해서는 2년간 출국을 하게 되면 추가로 비자를 위해 변호사 비용 및 리스크를 감수했어야 했기 때문에 출국하지 않고 이 악물고 버텼던 또 다른 독한 제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정말 독한 사람인가 봅니다.

     

    ◆◆◆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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